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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에 대한 소고(小考)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선비 사(士)’라는 글자가 공자(孔子, BC 551~BC 479)의 논어(論語)에도 나온다니 과연 오래된 개념이라고 여겨집니다. 중국에서 비롯된 글자가 한반도에서는 ‘선비’라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되면서 일상 낱말로 자리 잡은 시기가 고려시대라고 하니 그 역사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비라는 개념이 고려시대에 북송(北宋, 960~1127)에서 들여온 과거제도와 무관하지 않아 관심을 더합니다. 북송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는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하였으나 남송(南宋, 1127~1279)대에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면서 큰 변혁기를 맞습니다. 즉 과거에 응시하는 ‘사(士)’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응시자들이 합격의 기쁨보다 낙방의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응시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관직에 나가는 것보다는 학문하는 것에서 찾게 됩니다. “‘관(官)’보다 ‘학(學)’이 중요해진 ‘사’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문(文)’을 보급하는 일, 즉 ‘학문(學問)’을 가장 큰 사명으로 여기게 된다. 조선의 이상인 ‘선비’의 원형은 이렇게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참조: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2017).

필자에게 “조선의 이상인 ‘선비’의 원형은 이렇게 탄생하였다”는 문구가 무엇보다 가깝게 다가온 것은 ‘조선의 이상인 선비’, ‘선비정신’이 우리 정신의 바탕이라는 점이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비는 사회에서 ‘남을 배려하는 사람’, ‘배운 사람’, ‘존경의 대상’, ‘대쪽 같은 지조로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는 사람’ 등으로 집약되는 정신코드입니다.

그런데도 ‘선비’, ‘선비정신’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에서는 많이 멀어진 느낌입니다. 사회용어로 일정 거리감이 있다는 느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런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이만열(Emmanuel Pastreich∙미국인) 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사무라이 정신’과 비교해 ‘사무라이’보다 ‘선비’가, ‘사무라이정신’보다는 ‘선비정신’이 훨씬 정신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이만열,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2013).

또한 저자는 한국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소개하는 개념으로 선비정신(Seonbi Spirit)을 꼽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외국인의 지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독특한 매력을 뽐내는 존재감 있는 개념이 없다”고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선비정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만열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인들은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흔히 1953년 당시 한국의 소득 수준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같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소말리아와 같은 문화 수준이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가 더 값지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리에게 주는 경고성 질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누군가가 “한국인은 문화적 민족이 아니다, 또는 못 된다”라고 하면 아마 강한 반발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선비정신에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태도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득 중국과 일본 문화를 섭렵(涉獵)한 이만열 교수가 ‘선비정신’을 ‘Seonbi Spirit’라고 쓴 것에 주목합니다. ‘선비’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은 사실에 관심을 갖고 보니 중국이나 일본에는 ‘선비’라는 낱말이 없는 것입니다. 선비는 우리 민족이 고려시대부터 천년 넘게 써온 ‘토종 용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했다는 사실이 더욱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만큼 우리 생활에 깊숙이 스며 있다는 반증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모실 시(侍)’에서 비롯된 무사(武士) ‘사무라이’와 ‘선비’의 의미가 대조적임을 알게 됩니다. 조선의 선비는 제왕자리를 빼놓고는 사회계층의 정점인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라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의 사무라이는 번주(蕃主)를 섬기는 호위무사일 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개념적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비’ 또는 ‘선비정신’이 우리에게 ‘우리 것처럼’ 가깝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조선 왕조의 쇠락(衰落)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조의 멸망이 외적으로는 일본의 물리적 강점, 내적으로는 조선 왕조 지도층인 양반계급의 부패와 무능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에, 양반계급의 대명사이기도 한 선비 집단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도 무관하지 않을까, 그래서 선비정신에 대한 거리감이 커진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조 518년의 역사가 무너진 것은 조선 말기 당시 지도층이 ‘무능하였기 때문’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조선의 자생능력이 없다는 것을 대내외에 크게 부각시킨 점도 한 몫 하였습니다. 그 한 예로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1월 3일부터 1910년 3월 26일까지 5개월에 걸쳐 심문을 받을 때, 일제 검찰관이 내세운 논리의 첫 구절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한국”, 그래서 “일제가 한국을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김동길,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2017)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가령, 어느 고을에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부자가 그를 불쌍히 여겨 물리적 힘을 앞세워 선비 집을 개량하겠다고 나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로 식민사관의 본질입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필자가 아프리카 가나(Ghana)에서 그곳 동료에게서 들었던 에피소드입니다. 열대(熱帶)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실린더(Cylinder) 모자에 지팡이를 든 영국식 정장을 한 아프리카인 신사가 같은 복장을 한 신사를 만나자, “Cambridge?”, “No, Oxford”라고 나눈 짧은 대화에는 영국 식민사상이 ‘아프리카의 영혼’을 얼마나 철저히 침탈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통탄하는 ‘울분’의 소리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예외 없이 식민교육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다시 조선 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을 차분히 되돌아보겠습니다. 조선 왕조는 무능하였기에 망하였고, 그 중심에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이 있었습니다. 그 꽉 막힌 경직성은 조선시대 주자성리학의 대부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 주창한 숭명반청(崇明反淸)의 기치하에 ‘정의로운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사이비한 것을 철저하게 배척해야 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대원군은 당시 어려운 정국의 해결책으로 ‘위정척사’ 사상을 ‘쇄국정책의 밑거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대원군과 생각의 축을 공유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진보사상의 대표적인 인물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은 “(중략)이러한 우리 역사의 저력과 함께 그 변화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찾아보아야 한다. 나는 그 원인을 동양철학의 성리학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함석헌의 외침, 1988). 그는 성리학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가 세계정치의 흐름을 제대로 짚지 못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폐해(弊害)를 우리는 대원군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왕조가 500년 넘게 지탱하면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를 지켜온 중추적 역할을 한 시대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올곧음을 추구한 선비가 있었고, 그 ‘선비정신’이 조선 사회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조선시대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상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초상화의 역사적 의미를 살피면서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시대(이태호)”라고 집약하였습니다.

조선 초상화를 세계미술사적 측면에서 보면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500년이란 결코 짧지 아니한 시공간에서 조선 초상화가 보여준 그 일관성과 유일성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볼 수 없는 큰 궤적을 남겼습니다. 실로 경외(敬畏)스럽기까지 합니다. 문화예술은 태생적으로 시대흐름에 민감한 장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조선 초상화는 14세기 말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어진(御眞)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850~1941)이 남긴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초상화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정신을 끈질기게 지켜왔습니다.

동양과 서양이 그렇고, 어제와 오늘이 그렇듯이, 초상화는 대부분 주인공의 업적을 기리고 숭앙하기 위한 목적 하에 제작합니다. 그래서 초상화의 주인공이 실제보다 더 ‘아름답다’거나 더 권위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묵인되는 것이 보편적인 실상입니다.
그런데 조선 초상화의 경우, 그런 면에서 기존 초상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필자가 연구한 조선 초상화 519점 중 오직 90점, 즉 17.34% 만이 초상화의 중추 부분인 안면의 피부가 정상이고 82%가 다양한 피부 병변을 보이고 있었습니다(註: 조선 초상화는 고령자의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특기할 것은 조선국을 개국한 절대군주인 태조 이성계의 초상에서 이마에 작은 ‘혹’을, 25대 철종(哲宗)의 어진은 사시(斜視)를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그렸습니다. 이런 원칙이 지켜졌기에 다른 수많은 선비들의 초상화도 실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였으리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피사체는 물론 그 가족들이 훗날 영정으로 쓰여질 초상화를 조금은 곱게 그려지기를 소망했겠지만, 그런 흔적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이 실로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런 전통이 장장 5세기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었다는 점이 세계미술사적 의미를 더합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조선 초상화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 시대의 선비였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에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주창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범상치 않은 ‘역사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비정신’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지키고 가꾸어야 할 정신적 유산(遺産)이지 결코 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자는 선비정신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근래에 우리 사회가 정신적 지향점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선비정신의 계승을 통해 타개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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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회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등록일 : 2018-01-09 15:19     조회: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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