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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에 관한 어떤 오해>의 ‘어떤 오해’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필자가 독일에서 지내던 1970년대에 독일인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저우언라이(周恩來)’ 같은 이름을 보면 마오(毛)나 저우(周)처럼 성(姓氏)이 두[2] 음절이고, 일본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처럼 둘 또는 세[3] 음절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성은 ‘김’, ‘박’, ‘이’처럼 한[1] 음절일 뿐이다.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같은 조상을 모실 터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가계(家系)를 구별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아는 한국 학생의 이름이라고는 ‘김○○’, ‘박○○’, ‘이○○’뿐이었으니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의 경우 성씨인 모(毛)는 한 글자인데 ‘마오’로 발음하고, ‘주(周)’ 역시 ‘저우’로 발음하는 것이 중국어의 특징이고 일본의 성은 두 문자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지만, 세 음절로 발음하기도 하는데 ‘전중(田中)’을 ‘다-나-카’로 발음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그렇지만 한국어에서는 성씨인 ‘김(金)’, ‘박(朴)’ ‘이(李)’를 한 음절로 발음한다. 그런데 네 질문의 초점은 그 몇 안 되는 성씨로 어떻게 서로 구별해 낼 수 있을까, 궁금한 것이지?”라고 되물으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성(姓)이 ‘이씨’이고 나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레 씨족의 뿌리인 본관(本貫)이 어느 고장인지를 묻는다. 본관이 같은 경우, 같은 세대, 즉 형제자매간은 물론 사촌, 팔촌도 같은 글자를 돌림자로 쓰는 시스템이 있어 돌림자로서 친족관계를 더듬게 된다. 또한 ‘김씨’, ‘박씨’, ‘이씨’처럼 같은 성씨라도 많게는 수십 개의 본관이 있으며 본관이 다르면 아예 다른 성씨로 여긴다. 게다가 하나의 본관에도 여러 파(派)가 존재한다. 한국의 성씨에 수많은 본관이 존재하는 것은 왕조 시대에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게 국가가 새로운 본관이나 성을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공신들이 그 혜택을 입으면서 본관이 많아진 측면도 있다. 그래서 한국에는 성씨가 2,500여 개가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성씨는 그 뿌리가 멀게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늦어도 조선시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도 덧붙였습니다. 필자의 설명을 들은 독일 친구는 우리 성씨제도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이어진 제도라는 점에 놀라움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필자는 일본의 성씨는 어떤 면에서 독일의 역사와 연관이 있으며, 특히 유대인의 ‘이름 주기(Namensgebung)’와 맥을 같이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인 1970년대에 한 학술모임에서 오스카 간스(Oscar Gans, 1888~1983)라는 원로교수와 환담하던 중, 필자가 동양권 출신임을 의식한 그가 “자네 내 이름인 오스카 간스의 성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하시기에 ‘Gans’라는 낱말이 ‘오리’보다는 덩치가 큰 ‘거위(Gans)’인 줄은 알겠습니다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간스 교수는 “이것도 유럽 역사의 한 부분”이라며 필자에게 그 내용을 소상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약하면, “유대인들이 유럽에 정착해 ‘게토(Ghetto)’에서 모여 살면서 Mose(모세), Issac(이삭), David(다윗) 등 구약성서 식 이름만으로 살았다. 그런데 18세기 들어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제(Friedrich der Grosse, 1712~1786)가 당시까지 귀족에게만 내려온 성씨제도를 확대해 평민도 성을 가지도록 행정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유독 유대인들이 새로운 성씨를 갖는 것을 거부했다 합니다.”
 
1875년 독일제국은 영토 내 모든 거주자에게 의무적으로 성을 가지도록 행정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같은 조처에도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자 행정관이 ‘게토’에 들어가 가정마다 성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가장(家長)이 늘 ‘바지멜빵’을 하고 다니는 집엔 ‘호젠트레거(Hosentraeger, 바지멜빵 멘 사람)’, 설탕장사를 하는 집엔 ‘주커만(Zuckermann)’. 간스(Gans)라는 성은 문패처럼 ‘누구네 집’이라 표시하기 위해 현관에 그려놓은 ‘거위’를 보고는 집행관이 ‘거위’라는 성을 준 데서 유래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성씨 형성 과정이 독일과 비슷합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면서 여러 면에서 프리드리히 대제가 이끈 독일제국을 벤치마킹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 평민에게도 성씨제도를 도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도 독일 같은 방식으로 ‘밭 가운데에서 살았다’는 뜻의 다나카(田中), ‘소나무 밑’을 뜻하는 마쓰시타(松下)처럼 창씨(創氏)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의 일이니 우리의 성씨 역사에 비하면 무척 늦은 셈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오랜 성씨를 강압적으로 일본식으로 ‘창씨(創氏)’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일의 평민, 유대인, 또는 일본의 평민처럼 성씨(姓氏)가 없었던 것이 아닌데도 일본식으로 ‘갈아치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창씨가 아니라 변씨(變氏)였던 셈입니다.
 
그런데도 산케이신문의 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린 ’구로타 가쓰히로(黑田勝弘)’ 씨는 자신의 저서 《날씨는 맑으나 파고는 높다(조갑제 닷컴, 2017)》의 <창씨개명에 관한 어떤 오해>라는 글에서 한국에는 “성씨 자체가 200여 개밖에 없어서 김, 이, 박 씨가 각각 몇 백만 명에 이른다”, “...(중략) 일본과의 일체화라고 하는 ‘시류(時流)’도 있어서 한국인의 약 80%가 여기에 따랐다.”라고 썼습니다. 우리 민족이 시류에 따라 자진해서 창씨개명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오해’라고 하면서 창씨개명을 정당화하려 얄팍한 의도가 드러납니다.
 
구로타 가쓰히로 씨가 40여 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우리네 족보(族譜)제도를 몰랐다면 그의 오랜 한국 생활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알면서도 그런 글을 썼다면 지식인의 ‘왜곡행위’가 줄 수 있는 공포증의 본보기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다.
 

[출처 : 자유칼럼그룹 2018.07.27.]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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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회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등록일 : 2018-08-08 14:27     조회: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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