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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열심히 일한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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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100년, 간송의 정신을 가슴에 아로새기다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근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대한 콜랙숀> 이란 제하에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 특별전>이 올해 14일에 공식 개관하였습니다. 필자는 전시 개막식에 이어 다섯 번을 다녀왔고, 앞으로도 331일 전시 마감일까지 서너 번 다녀올 예정입니다. 한 전시회를 이렇게 며칠이 멀다 하고 다녀본 적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필자가 이렇게 발길을 끊을 수 없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몇몇 일화가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쳐 갑니다.

우선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은 필자가 6년을 다닌 보성(普成)·고등학교의 교주[校主(오늘의 재단 이사장)]이셨습니다. 간송 선생이 주인이셨던 학교에 다녔다는 것입니다.

보성보통고등학교(普成普通高等學校)1906년 개교한 이래 늘 재정이 열악하였다고 합니다. 1930년 말 더욱더 어려워져 폐교(閉校)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런 보성학교를 간송 선생은 큰 재정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넘겨받았던 것입니다. 1940년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더욱 강하게 펼친 우민정책(愚民政策)에 항거하는 뜻에서도 보성학교란 교육기관의 인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에 이미 간송 선생은 학교행정은 교장에게 전적으로 위임하면서 요즘 말로 학교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분명하게 분리하였던 본보기를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교정에서 교주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예외가 한가지 있었습니다.

1954년 즈음 임시피난처 부산에서 서울로 수복(收復)’ 후 삼일절이면 교주 간송 선생은 모든 학생이 모인 운동장이나 강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낮은 음성으로 읽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발이 시려서 차분히 서 있지 못하고 철없이 발을 동동거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왜 교주께서 삼일절이면 그리도 묵묵히 독립선언서를 굳이 낭독하였을까 생각하면, 간송 선생은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우리나라가 혹독하게 강탈당하였던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비통하셨으면 그리셨을까, 오랜 세월 후야 점차 깨달으면서 큰 울림으로 다가오던 것을 기억합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Noblesse oblige> 이야기입니다. 1940년 보성학교를 넘겨받은 이후, 아들 셋을 다른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고 모두 보성에서 다니도록 하신 것입니다. 당시 보성학교는 간송 선생이 넘겨받기 전의 혼란스러운 학교이었을 것입니다. 일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결코 자기 아들은 예외적으로 더 좋은 다른 학교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반면 학교 내실에 전력하여 빠르게 반듯한 학교로 면모를 갖추도록 하셨습니다. 조용히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작금에 우리 사회지도층 엘리트들이 간송 선생의 올곧은 정신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1962년에 서독 후랑크후르트에서 <한국문화보물 5천 년 전>이 열렸습니다. 독일 즉 유럽 땅에 한국문화예술품이큰 규모로 다양하게 소개된 것이 처음이라고 독일 유명일간지들이 크게 보도한 전시회에서 필자는 당시 전시 담당관으로서 전시장을 지키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선생을 만났었습니다.

서독 내에 한국 교포사회라는 것이 아직 없던 시절에 나이 어린 필자를 외지에서 봤다고 아주 따듯하게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그러한 연유인지는 모르나 혜곡 선생은 필자와 전시장을 함께 돌아보면서 작품해설을 몸소 하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전시된 문화재 중에 많은 것이 간송 박물관 소장이란 작은 푯말이 있어, “간송 선생이 저의 교주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혜곡 선생이 필자의 손을 덥석 잡으시고는 바로 얼마 전(1962.1.26.) 간송 선생이 작고하셨다는 비보를 전하시며 그렇게 슬퍼하는 것입니다. 진솔한 애도가 전해오면서 함께 슬퍼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당시 전시장에 진열된 정선(謙齋 鄭歚), 김홍도(壇園 金弘道) 서화작품은 물론 크고 작은 금동불상을 비롯하여 각종 고려청자 및 조선백자가 대부분 간송 선생의 수장품이었다는 것이 큰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아울러 그만큼 우리 문화재를 컬렉션하신 간송 선생의 큰 걸음을 보았던 것이 전혀 허상이 아니었음을 오늘 다시 확인하며 가없는 아름다운 긍지를 가슴 깊이 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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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간송 선생님은 그렇게 우리 문화재를 지켜주신, 그래서 문화수집가의 선을 넘어선 문화독립운동가 이시었습니다.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 특별전>에서 간송 선생께서 낭독하기 위해 몸소 원고지에 정갈하게 써놓으신 육필 독립선언서를 보면서, 간송 선생이 후세에 그리도 전하고 싶으셨던 삼일운동 정신을 가슴 깊이 다시 아로새기게 됩니다. [사진 자료: ‘() 간송미술문화재단제공


주해: 윗글은 본인이 기고한 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기파랑, 2017), <<그가 있었기에 최순우를 그리면서>> (진이진, 2017)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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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회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등록일 : 2019-02-15 14:27     조회: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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