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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소리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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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열심히 일한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
우리가 추구하는 “바른사회”입니다.

‘진료 기록’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몰지각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아.무.개. 진료 기록 제출 강요”라는 기사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국가 기관의 몰지각한 수준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옛 포도청(捕盜廳)도 아닌데 말입니다.

오래전에 한 대기업 임원으로부터 부하 직원의 건강 문제를 상담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료 후 그 임원은 놀랍게도 필자가 환자와 상담한 내용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마치 무슨 권리라도 있는 듯 말입니다. 그래서 상담 내용을 알고 싶으면 우선 환자에게서 자기 개인 정보를 상사와 공유해도 좋다는 동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임원은 “내 부하 직원이고, 내가 보낸 환자인데…”라며 몹시 불편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의료 정보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개인 정보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권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예가 있습니다.
진료실을 찾아온 50대 중년 신사가 있었습니다. 환자의 모습에서 이미 심신이 많이 상한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는 고등학교 교감 임명을 눈앞에 둔 시점에 받은 종합신체검사에서 성병 검사의 하나인 에서 미(微)양성 반응 (+)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는 아주 오래전 매독(Syphillis) 병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아 완치되어, 더 치료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환자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환자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가시지 않고, 오히려 환자가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환자가 군복무시절, 그러니까 30여 년 전 성병에 걸려 ‘페니실린주사’를 맞고 치료받은 적이 있는데, 아직도 양성반응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필자가 ‘(+) 반응’은 양성, 음성 반응, 즉 혈청 내 병균 유무가 아니라 혈청에 일종의 흉터 자국인 혈청상흔(血淸傷痕, Seronarbe syphilis)이며, 이것이 없어지려면 앞으로 많은 세월이 지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건강상에 전혀 문제가 없으니 마음을 가볍게 가져도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래도 환자는 슬픔의 그늘에서 벋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털어놓은 그간의 고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의 검사 결과가 교내 구성원 모두에게 알려져 학부모들이 앞장서서, 그를 직장에서 퇴출하려는 운동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학생들도 알게 되어 등을 돌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문제의 발단은 종합신체검사결과가 직장 총무인사과에 전해졌고, 인사과 소속 일반 직원이 성병 검사에서 양성반응 아닌 양성반응을 ‘공개’한 것입니다. 너무 황당하여 필자도 놀랐습니다. 신체검사결과, 즉 소홀한 개인의료정보 관리의 허점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어느 날 총무담당자가 필자에게, “건강하심을 축하합니다.”라고 하기에 “고맙지만, 무슨 말이냐?” “종합건강검진결과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찔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외국의 경우 모든 신체검사결과는 의료 인력에 의해서만 철저하게 관리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가슴이 답답하였고, 지금 다시 생각하여도 그렇습니다.
 
앞서 선생님이나 필자가 겪었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개인 정보에 대한 관리개념이 매우 희박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서구 사회는 매우 다릅니다. 필자가 독일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며 해부학 실습을 할 때의 일입니다. 수업에 앞서 가장 먼저 실습 시구(屍軀)에 대해 학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경건한 마음가짐을 배웠습니다. 더불어 시구에 대한 정보는 어떤 것이라도 절대 실습실 밖으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시구의 얼굴 인상이 어떠하다는 것조차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함구령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자를 직접 대하는 임상학 과정에서는 환자의 비밀 준수 관련 지침이 차원을 달리할 만큼 엄격했습니다. 진료 과정에서 보고 들은 사항은 모두 ‘환자의 개인 정보’이므로 절대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는 강도 높은 수련 지침이 선행되었습니다. 환자와 관련한 정보는 병실 밖에서 절대 누설하지 말라며 ‘중국의 세 마리 원숭이(각각 눈과 귀와 입을 막은 원숭이)’ 슬라이드 자료를 보여주던 담당 교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런데 임상 실습에 즈음해 담당 교수가 언급한 사례는 더욱 강한 메시지를 남기기에, 충분했습니다.

한 산부인과 의사가 친구의 부인을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의사는 진료를 받았던 환자의 남편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습니다. “내 아내가 자네한테 진료를 받았다며? 고마워.” 의사는 별것 아닌 일로 고마워할 것까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물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아니야. 특별한 사항은 없었었으니 걱정하지 마.” “그래도 뭔가 문제가 있어 진료를 받지 않았겠어? 이유가 뭐야?” “작은 염증. 별거 아니야.” “무슨 염증?” “별것 아니래도….” “야, 남편으로서 궁금해서 그래.” “그냥 가벼운 질염(膣炎).” “세균성?” “아니, 작은 이물질에 의한 염증.” “무슨 이물질?” “작은 콘돔 조각 때문에 생긴 이물질 반응이었으니 걱정하지 마.”
그날 둘의 대화는 별일 없이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주 후 산부인과 의사는 친구의 부인으로부터 ‘의사의 침묵할 의무를 지키지 않아 남편으로부터 이혼 소송을 당했으니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한다’라는 내용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지난 몇 개월 동안 아내와 성관계를 한 적이 없다면서 불륜을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결국, 의사는 법원이 내린 막대한 배상액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그는 지역 의사회로부터 ‘회원 자격 영구 박탈’이라는 조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위의 예에서 보여준 법원의 판결과 해당 지역 의사회가 취한 조치의 공통 핵심 사항은 ‘개인 정보의 유출’에 대한 엄격한 제재입니다.

기원전 약 450년, 지금부터 약 2500년 전 성의(聖醫)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생 결코 밖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보거나 들을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모든 것을 비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절대 누설하지 않겠노라.” 개인 의료 정보의 중요성은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지켜온 의사들의 윤리지침이기도 합니다.

아마 서구 문화권에서는 국가 기관인 경찰청이 “아.무.개. 진료 기록 제출 강요”라는 험한 말을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개인 정보’와 관련해 갈 길이 아직 멀었는가 봅니다.

그런 와중에 의사 단체가 ‘개인 의료 정보’를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몰지각한 서울경찰청을 상대로 즉각 고소장을 제출했다고 하니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의과대학 졸업식장에서 행하여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헛되지 않았다는 흐뭇한 생각을 하며 교육의 의미도 함께 반추해봅니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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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회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등록일 : 2019-07-01 14:16     조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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