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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소리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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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열심히 일한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
우리가 추구하는 “바른사회”입니다.

‘싸구려 의료’로 내몰린 의료계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1970년대,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필자는 서울주재 한 외국 외교관으로부터 독일에서 귀국해 의료인으로 일하며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필자는 의사로서 환자에게 처방을 내면서 환자가 처방 약을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그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 질문을 한 외교관은 열악한 대학연구소 환경을 염두에 두었던지 약간 민망해하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당시 병원을 찾는 환자나 그 가족은 병원에 오기가 많이 ‘무서웠을 것’입니다. “우환(憂患)이 도적이다”라는 한탄의 소리가 크게 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1976년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도입된 건강보험 제도는 국내 의료계는 물론 환자인 의료소비자에게 지각변동에 버금가는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른바 ‘소신 진료’를 하게 된 것을 필자는 가장 큰 변화로 보았습니다. 일종의 ‘해방감’이랄까. 그러나 곧 암울한 먹구름이 덮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부주도의 일방적 의료수가(醫療酬價) 책정은 현실과 거리감이 컸던 것입니다. 그 폐단이 지난 40년간 이어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 의료계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책정된 의료수가가 얼마큼 적절한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료의 한 축인 의사나 의료기관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마다하지 아니할 것이고 다른 한 축인 의료소비자, 곧 환자는 ‘소소익선(少少益善)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균형을 잡아 줘야 할 정부 기관은 방관만 해왔고, 시민단체는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국내 의료서비스는 ‘물량 우선주의’, ‘저가우선주의’라는 깊은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중 근래 시작된 ‘의료 전달 체계(Health care delivery system)’의 파괴는 대형병원의 이른바 ‘無 특진비’로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가속화되었습니다. 외래에서 ‘2분 진료’로 집약되는 ‘싸구려 진료’의 표상입니다. (국내 대형병원은 외래 3시간 진료에 환자 100명, 즉 환자당 1.8분이 걸립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환자당 15~20분이 걸립니다.)

‘의료 전달 체계’는 모든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미 오래된 사회 시스템입니다. 이 의료 시스템의 본질은 환자 상태의 경중에 따라, 그에 적절한 의사의 진료를 받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즉 가벼운 감기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는 1차 진료 기관인 동네 의원에서 치료받고, 좀 더 심각한 환자는 2차 진료 기관인 중소병원에서, 그리고 희귀병(稀貴病)이나 중증 증상의 환자는 3차 진료 기관인 대형병원에서 치료 및 관리를 받는 것이 의료 전달 체계의 요추(要樞)입니다. 이는 거시적으로 볼 때 시간과 자원의 효율성을 확보하자는 순기능의 의료제도이기에 오랜 역사 속에서 구축 및 발전해온 시스템입니다. 즉 의원, 중소병원, 대형 병원 계가 일궈낸 알고리즘(Algorithm)입니다.

그런데 근래 상기 병·의원 간 순기능인 환자 의뢰 제도가 무참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중증환자를 집중적으로 보살펴야 할 전문인력이 몰려오는 경증환자를 챙기느라 ‘고급인력의 소모’라는 초유의 의료현실을 맞닥뜨린 것입니다. 애초 의료계가 그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했지만, 의료 정책 입안자는 자신의 ‘정책 철학’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듣자니, 전문가들의 의견을 묻겠다는 모임에서 임상 의사가 “환자가 지닌 증상의 경중에 따라, 즉 의료 전달 체계 안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순리”라는 의견을 제시하자, 시민연대의 한 사람은 환자가 어느 병원 어느 의사의 진료를 받는 “환자의 선택권이 더 중요하다.”라는 ‘명언’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애길 접한 필자는 암울한 심정을 가누기 힘들었습니다. 루쉰(魯迅, 1899~1944)의 《아큐정전(阿Q正傳)》에서 오만하게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아큐’가 떠올랐습니다.

몇 달 전, 우화에 버금가는 의료 관련 소식이 외신을 타고 전해왔습니다. 캐나다에서 유학 중이던 한 우리 대학생이 미국 그랜드캐니언 절벽에서 추락 사고를 당했는데(뉴스 2018.12.30), 그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서 1개월여 사경을 헤매던 학생은 다행스럽게도 입원 2개월여 만에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입원치료비가 무려 10억 원에 달했고 합니다. (뉴스 2019.2.13) 추리해보면, 학생은 길게 잡아 1개월 보름, 그러니까 약 6주를 집중치료실(ICU)에서 보냈을 테고, 그 후 일반병실로 옮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국내 대형병원에서는 6주를 집중치료실에서 보내고 2주간 일반병실에서 치료를 받으면 병원비가 아무리 높게 책정해도 5000만 원(건강보험비 포함)을 넘지 않을 거라고 병원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병원의 입원 또는 진료비가 우리보다는 높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차이가 무려 20배 이상이라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물리적인 비교 속의 [1 : 20]이라는 수치이니 작금의 국내 의료환경이 자못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라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저렴한 병원비용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하지만, 우리가 지금 누리는 혜택이 ‘싸구려 진료’의 늪에 깊숙이 빠져있지는 않은지 통찰해보아야 합니다.

한 해외 전문 조사 기관(Economist Intelligence Unit)이 발표한 2019년 전 세계 생활비(Worldwide Cost of Living 2019)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은 조사 대상 133개 도시 가운데 뉴욕, 코펜하겐 등과 함께 공동 7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자유 칼럼, 박상도의 ‘뉴욕보다 비싼 서울의 장바구니 물가’, 2019.7.22).

그런데 ‘의료 물가’는 이번 그랜드캐니언 사고에서 볼 수 있듯 치료비가 미국보다 무려 20배나 싼 게 현실입니다. 바로 같아야 할 것들 사이의 모순적 불일치의 본보기입니다. 우리네 ‘싸구려 의료’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한 번 쓴 주삿바늘을 재사용하는 전형적인 ‘저개발국 형’ 의료사고가 발생합니까? 암담하고 부끄러운 우리 의료계의 ‘싸구려 진료’가 초래한 민낯입니다.

필자는 국가 기관이 국민에게 법규를 올바로 지키도록 하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편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유도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료소비자인 국민이 ‘싸구려 진료’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으뜸가는 책무입니다. ‘싸구려 의료’로 내몰린 국내 의료계를 살려야 국민 또한 비로소 진정한 의료 복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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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회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등록일 : 2019-07-29 14:05     조회: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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