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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열심히 일한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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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의회 견문기 1

바른사회운동연합 입법감시위원장 박종흡

박종흡 바른사회운동연합 입법감시위원장

  나는 1967년부터 1996년까지 29년 동안 국회에서 근무했다. 국회는 나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다. 입법차장을 끝으로 퇴직한 후 10여 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이 일은 인생의 덤이었다고 생각한다.
 
  재직 기간에 10년은 외국을 상대하는 섭외국(지금의 국제국)에서, 11년은 국회운영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종사했다. 이러한 이력 때문인지 아니면 운이 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직에 있는 동안 나랏돈으로 의원들을 수행하여 세계 많은 나라 의회를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번에 바른사회운동연합 입법감시위원회 일을 맡게 되면서 그동안 선진의회 방문 길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 중 인상 깊었던 점 등을 되새겨 글로 남기고자 한다. 무엇보다 우리 국회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입법으로 말하는 미국의회
 
  국회 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지 2년째 되는 해인 1969, 아시아재단이 주관하는 미국의회연수(U.S. Congressional Fellowship) 프로그램 시험에 응시하여 다행히 합격했다. 1년간의 미국의회 연수,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선진 의회 경험이었다. 미국에서의 첫 기착지는 재단 본부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였다. 그곳에서 며칠 동안 연수 일정을 포함한 미국 체류 중에 알아 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워싱턴에서의 일정은 미국 정치학회가 주관하는 세미나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로그램 참가자는 30명쯤으로 기억되는데 주로 미국 내 정치학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들과 신문사 젊은 기자들이었고 외국에서는 나와 파키스탄에서 온 신문기자 하산이라는 친구와 중남미에서 온 몇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 미국 정부와 의회의 제도 그리고 운영에 관하여 정치학 교수들과 행정부 및 의회 관계자들의 강의를 들었다.
 
  세미나 일정이 끝난 후 각자는 본인의 선택에 따라 반년씩 교대로 하원이나 상원의 어느 사무실에서 실제로 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각자 알아서 사무실을 찾아가 면담을 해서 정하라는 것이다. 재단이나 학회 측에서 나처럼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는 미리 지정해 줄 것으로 알았는데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유경쟁이 철저히 적용되는 미국 사회에서는 이런 사고방식이 당연하다는 것을 난 그때 깨닫지 못했었다.
 
  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의사당으로 달려가 무조건 이 방 저 방 노크하고 들어가 생면부지의 직원을 붙들고 서투른 영어로 한국에서 온 아무개인데 사무실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온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봐도 외국 사람에게는 사무실을 공개할 수 없다느니 직원을 더 쓸 공간(스페이스)이 없다느니 하면서 퇴자 놓기가 일수였다. 참으로 난감한 하루하루가 일주일도 넘게 계속되었다. 상심하여 끙끙 앓고 있던 어느 날 내 머릿속에 한국에 있을 때 하원 청문회에서 어느 지한파 의원이 무슨 발언을 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언뜻 생각났다. 바로 블룸필드(Broomfield) 의원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 사무실로 달려갔다. 문 열고 들어가 이런저런 사정 얘기를 했더니 금발의 여직원이 의원에게로 인도했다. 갈색 머리에 온순한 얼굴 모습을 한 중년의 신사였다. 나는 내 있는 영어 실력 다 내놓고 젖 먹던 힘 다 빼내 내 소개를 하였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줄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다닐 때 나 딴에는 영어를 잘 한다고 굳게 믿었었는데 그 순간에는 다 소용이 없었다.
 
  내 말을 다 들은 블룸필드 의원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안심시킨 후 그 길로 자기 직원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고는 책상을 마련해 줄 테니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여 근무하란다. 천우신조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날 모처럼 만에 발을 펴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미국 의회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었다. 블룸필드 의원은 당시 소수당이었던 공화당 소속의 외교위원회 간사였다. 미국의회에서는 이른바 다선의원 우선 규칙(Seniority Rule)’에 따라 위원회 위원 중 다수당 최다선 의원이 위원장이 되고 소수당 최다선 의원이 간사가 된다.
 
  당시 의원 사무실 직원은 8명이었다. 이 중 수석보좌관(AA: Administrative Assistant), 민원비서관(Case Worker), 입법비서관(Legislative Assistant), 언론비서관(Press Assistant) 등이 주요 직책이고 이밖에 선거구담당 비서관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의원에게 중요한 연락사항이 있을 때 워싱턴 사무실에 오고 대부분 선거구 사무실에서 일한다.
 
  의원실 직원의 보수체계는 전원 공무원 급수로 보하는 우리 국회의원과는 달리 의회가 각 의원에게 일정액의 보조원 채용수당을 지급하면 의원은 그 범위 내에서 직원을 고용한다. 미국의회 의원의 보조직원을 의회 고용인(Congressional Employee)이라 칭함은 여기에 연유한다.
 
  의사당 내 하원의원 사무실은 지금의 우리 국회의원 사무실보다 좁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복사기 등 사무기기를 배치하고 남은 공간이 하도 비좁아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 놓고 근무하고 있었다.
 
  의원과 직원들은 매일 아침 8시를 전후로 각자의 차를 몰고 와 주차한 후 사무실로 올라온다. 의원을 비롯한 모두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각자 묽은 아메리칸 커피를 타서 큰 머그잔에 따라 마시는 것이다. 다음은 수석이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의원에게 다가가 그날의 일정과 주요 업무를 보고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책상이나 의자에 다리를 얹고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하는 모습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나로서는 너무나 진귀한 장면이었다. 후에도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블룸필드 의원은 무슨 지시를 내릴 때 나이 어린 직원에게도 친구처럼 이름을 불렀다.
 
  의원 사무실에서의 나의 일과는 주로 선거구민이 보내오는 민원 편지들을 분류·요약해 주는 일과 직원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는 것이었다. 말이 그렇지 직원들이 너무 열심히 일하는 터라 한가하게 이들과 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선거구민에 보내는 편지가 하루에 수백 통은 되었고 어떤 중요한 민원에 대한 답신 편지는 의원이 직접 읽어보고 일일이 서명을 하였다.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한국미의회 속기록에 실리다
 
  직원들은 바쁜 중에도 모두 나를 잘 대해 주었는데 수석비서관인 씬클레어와 민원 비서인 캐롤이 특히 나를 잘 보살펴 주었다. 40대 초반의 노총각인 씬클레어는 내가 어디를 가보고 싶다고 하면 일일이 그곳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고 특히 내가 그때 쓰고 있었던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한국이라는 제하의 글을 꼼꼼히 돌봐 주었던 일은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내 글은 완성되자마자 블룸필드 의원이 하원 본회의 석상에서 소개하여 속기록에 실렸었고 나는 지금도 내가 젊었을 때 최소한 하나는 보람 있는 일을 했었구나 하고 흐뭇해하고 있다.
 
  난 그해 11월 어느 주말에 블룸필드 의원을 따라 그의 선거구가 있는 미시간 주 랜싱에 간 적이 있다. 그는 워싱턴이나 해외에서의 특별한 다른 일정이 없는 한 예외 없이 주말마다 선거구에 내려간다. 집에는 처와 중학생 정도 되는 남매가 살고 있었다. 다른 많은 의원과 마찬가지로 그도 주중에는 워싱턴 근교의 조그만 집을 렌트(전세)하여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찻값이나 식사 값으로 10불이나 20불정도 후원금
 
  선거구에서의 활동은 주로 조찬이나 티타임 형태로 열리는 주민모임에 참석하여 지역이나 국가적 정책 현안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고 답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기한 장면은 모임이 끝나면 참석자들이 으레 찻값이나 식사 값으로 10불이나 20불정도 지급하였고 이 돈은 후원금으로 블룸필드 의원에게 전달되었다.
 
  하원의원의 임기는 2년이기 때문에 당선되자마자 재선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재선되려면 선거구민이 뽑는 예비선거(primary election)에서 승리해야 한다. 소속정당의 내부공천제인 우리와 이 점이 다르다. 그 때문에 소속정당의 노선에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거구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 이보다 더 중요하다. 미국의회 의원이 자율성이 강하고 정당을 초월한 교차투표(cross-voting)까지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의사당(Capitol) 내 본회의장 또는 위원회 청문회장에 들어가 참관하거나 의회도서관에 가 필요한 자료를 구해 복사하는 일 등등으로 소일하였다.
 
  미국의회 본회의는 휴회결의가 없는 한 부의안건 성질에 따라 정해지는 요일별 의사일정 캘린더대로 거의 매일 열린다. 간혹 본회의장에 들르면 의석에 의원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 상원의 경우는 두세 의원이 있는 때도 보였다. 후에 그 이유를 알아보니 개의 시에는 의사정족수 참석을 요구하지만 일단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은 의석의 어느 의원이 정족수 확인 요청이 없는 한 그대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회의장에 없는 의원들이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각 자 위원회나 의원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안건 표결이 있을 때는 상황이 확 바뀐다. 표결을 알리는 부자가 각 의원사무실에 걸린 시계에서 울리면 의원들은 불이 났게 회의장으로 달려가 몇 분 내에 의석이 꽉 찬다. 미국의사당에는 각 의원회관과 본회의장을 연결하는 지하철이 운영되고 있었다.
 
  의원의 표결 참가는 생명과도 같이 중히 여겨지고 있었다. 개개 법안에 대해서 의원이 어떤 처지에서 투표했는가는 선거구민에게 지대한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더욱이 이유 없이 표결에 불참한 사실이 알려지는 경우 다음 선거에서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의 지시대로 표결하는 우리 의원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본회의에서의 토론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토론 대상 안건마다 당별로 토론주도의원(대개 그 안건 제안자가 된다.)이 지명되어 있어 이들은 다른 지지의원과 팀을 이루면서 최종 처리될 때까지 토론을 이끈다. 아주 중대한 법안 토론의 경우 총무가 직접 나서 토론을 주도하기도 한다. 토론방식은 일종의 릴레이식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 국회처럼 단시간 내에 토론이 종결되는 예는 거의 없어서 며칠 혹은 몇 달 심지어 1년간 토론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발언도 발언대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석 통로 여기저기에 설치된 마이크도 사용하였다.
 
  위원회중심 운영제도를 택하고 있는 미국의회에서 위원회의 회의와 심사절차는 매우 실용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회에서는, 본회의나 위원회나 할 것 없이, 우리 국회처럼 행정부 각료나 공무원을 불러 놓고 회의를 하는 경우는 없다.
 
  예산법안을 비롯한 모든 법안은 의원만이 발의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행정부가 법안을 제안하고 싶을 경우 대통령이 교서 형태로 의회에 제출하면 의장이 소관위원회에 이를 회부, 위원장 명의로 발의한다. 내각제가 아니어서 대정부질문 제도도 없다. 행정 각료나 관료를 불러오는 방법은 위원회나 소위원회가 개최하는 청문회에 증인 혹은 참고인으로 초청하거나 소환하는 길밖에 없다.
 
토론과 축조심사 생략 없이
 
  위원회의 법안심사절차를 보면 대략 제안설명과 대체토론이 끝나면 소위원회에 회부 심사케 하거나 전체회의에서 직접 내용 토론을 한 후 축조심사를 거쳐 표결한다. 이러한 절차는 외형상으로는 우리 위원회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 큰 차이가 있었다. 첫째는 우리 위원회가 청문회를 형식적 절차 정도로 여기는 데 비하여 미국 위원회는 이를 필수절차로 보는 데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갔었던 50년 전에도 의사당 어느 곳에서는 매일 청문회가 열렸다. 둘째는 우리와는 달리 미국 위원회에서는 토론과 축조심사가 생략되는 일 없이 매우 실무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듬해 4월 나는 하원 생활을 마치고 상원 운영위원회라는 곳에 6개월간 배속되었다. 의원사무실과는 달리 상원 위원회의 사무실 분위기는 무척 딱딱해 보였다. 드나드는 외부 사람들도 거의 없고 직원들도 모두 내 아버지와 어머니뻘 되는 사람들이어서 말붙이기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지난 몇 달 동안 미국 생활에 어느 정도 길들어서 그런지 나는 그런대로 잘 버텨내었던 것 같다.
 
  나는 그해 101년간의 워싱턴 생활을 마치고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어려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꿈만 같은 젊은 한 시절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후일 큰 지적 재산이 되었던 것이 없는 건 아니다. 다름 아닌 그곳 의회에서 선진 된 제도와 운영 모습을 보면서 느끼고 배운 것을 틈틈이 적어두었던 메모다. 이 메모는 후일 내가 국회운영위원회 전문위원으로 10여 년간 몸담고 있는 동안 청문회와 5분발언제도의 도입, 법제예산실의 신설 등 우리 국회의 제도 개선에 많은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퇴직한 지 오랜 기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내 서재 한구석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바른사회운동연합 입법감시위원장 박 종 흡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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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흡 이사(바른사회운동연합 입법감시위원장)
 
성균관대 행정학박사
국회입법차장(前)
공주대 객원교수(前)
現 수필가 시인
등록일 : 2018-09-11 14:42     조회: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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