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로그인 바로가기
문서 자료실 바로가기

바른소리쓴소리

바른소리쓴소리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열심히 일한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
우리가 추구하는 “바른사회”입니다.

‘전과(前科)자’ 이야기

이성낙 박사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 •약사평론가회 前 회장 -(사)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이 글은 요즘 정치의 계절이긴 하지만, 결코 정치 이야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1960년대 필자가 독일의사국가고시에 응시할 때 겪은 일화입니다. 대학 응시관리처에 가서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문의했더니 몇 가지 준비해야 할 서류 목록을 주었습니다. 그걸 받고 살펴보니 생소한  항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Fuehrungszeugnis’였습니다.


 ‘Fuehrung(안내하다, 지도하다)’도 알겠고 ‘Zeugnis(증명서)’도 알겠는데, 그 두 단어의 복합어인 ‘Fuehrungszeugnis’는 알 듯 모를 듯했습니다.

독일에서 생활한 세월이 그리 짧지도 않아 약간은 쑥스러워하면서 담당자에게 ‘Fuehrungszeugnis’는 어떤 서류이며, 어디서 발부받아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지방법원(Gerichtshof)에 가서 그 서류를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순간 당황해서 범법 행위를 한 적도 없는데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담당자는 별것 아니라는 듯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국가고시 응시자는 그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말했습니다. 여하튼 그 ‘Fuehrungszeugnis’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내신서(內申書)’, 그러니까 일종의 범죄경력증명서입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거나 국가 기관에 취직하려면 반드시 범죄경력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생 기숙사 휴게실에서 고성이 들려오기에 궁금해서 그곳으로 가봤습니다. 두 학생이 서로 고성을 지르며 한바탕 몸싸움이라도 할 기세였습니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싸움다운 싸움을 보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두 학생은 네가 먼저 쳐!” 하며 소리만 질러댔지 육체적 충돌은 하지 않았습니다. 필자가 조금은 신기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곁에 있던 한 친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 둘은 모두 법과 대학생이야. 육체적 싸움을 했다는 게 기록으로 남으면 법대 졸업장도 날아가고, 변호사 자격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거든. 그래서 입으로만 싸우는 거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먼저 때린 사람이 모든 책임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 물론 먼저 맞은 해자는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건 바로 범죄경력증명서 때문이었습니다. 필자가 서울에서 지낸 어린 시절, 기습적으로 상대방을 먼저 때려눕히는 걸 영웅시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필자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궁금해서 하루는 독일에 있는 친구와 통화하던 중 아직도 그 ‘Fuehrungszeugnis’라는 게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이랬습니다. “없어질 이유가 없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너무 억압적인느낌이 들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부연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독일에서는 한 지역에서 개원했던 의사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 필히 ‘Fuehrungszeugnis’를 제출해야 해. 만약 어떤 의사가 마약을 했거나 성추행 등의 범법을 저질렀다면 더 이상 의료행위를 할 수 없지.” 그러면서 그런 범법자로부터 의료 소비자인 국민을 보호하는 게 국가의 책무라고 강조했습니다. 필자는 그 얘길 듣고 어떤 반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즈음 이른바 전과자가 우리 사회의 최정점에서 활보하는 모습을 보며 필자는 헷갈립니다. 놀라운 점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괜찮아 증후군에 걸린 듯 그런 것을 못 본 척,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러한 범죄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셈입니다. 거기에다 한 철학자는 하늘이 내린……운운하기까지 합니다. 숨이 막힙니다.

 

 문득 프랑스 화가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가 그린 송아지[]에 바치는 경배(L'Adoration du veau, 1941~1942)’란 작품이 생각납니다. 파리가 나치 독일 점령하에 침울하기만 하던 시절 그린 작품인데, 여기서 송아지는 멍청이를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풍자한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매우 불편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작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 때문에 무거운 마음을 가누기 힘듭니다. 아마도 필자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먼 나라 이야기가 더 멀고도 먼 나라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올곧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감대가 속히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등록일 : 2022-01-21 15:33     조회: 5333
Copyright ⓒ 바른사회운동연합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