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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고아의 ‘푸른 눈의 어머니’ 백제인 여사...김영수 총재, 40년 넘은 우정 화제

바른사회운동연합

[박현수가 만난 人] 韓고아의 ‘푸른 눈의 어머니’ 백제인 여사...김영수 총재, 40년 넘은 우정 화제

 

(2023.11.14_인터뷰365 게재)

 

■365인터뷰] 1963년 제천영육아원 설립한 대모(代母), 백제인 여사

 

-일평생 홀로 헌신 봉사...결혼도 않은 채 지금껏 길러낸 소중한 '자녀'는 1304명

 

-김영수 프로당구협회(PBA) 총재, 40여년 전 영육아원 건물 설립 앞장...이후 이어진 42년 선행 인연

 

-12일 제천영육아원 찾아 후원금 전달

 

-2018년 십시일반 기금 모아 백제인 여사 흉상 헌정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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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충북 제천에 있는 ‘제천영육아원’을 방문한 김영수 프로당구협회(PBA) 총재(사진 왼쪽)가 백제인 전 제천영육아원 원장(가운데)에게 후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오른쪽은 박민옥 현 제천영육아원 원장./사진=박현수


인터뷰365 박현수 편집위원(/제천) = 지난 12일 충북 제천에 있는 ‘제천영육아원’에서는 훈훈한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가 연출됐다.


주인공은 설립 60주년을 맞은 제천영육아원 백제인(88.미국명 제인 화이트) 전 원장과 김영수 프로당구협회(PBA) 총재(81.전 문화체육부 장관).


이날 백제인 전 원장은 3년 전부터 병환으로 거동이 어렵고 말도 잘 못하지만 김영수 총재가 두 손을 잡으며 인사하자 “고마워”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김 총재는 백 전 원장에게 영육아원 발전 기금을 전달하고 위로했다. 또 충주 충원고교를 졸업하는 양 모 군에게 장학금 100만 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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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천영육아원 정문에 설치된 백제인 여사의 흉상/사진=박현수


이에 앞서 김 총재는 당시 한강 포럼 김용원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과 함께 백 전 원장 생전에 흉상을 제작해 헌정하기로 결의해 십시일반으로 1억 원에 가까운 기금을 모아 2018년 10월 12일 회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육아원 정문에서 흉상 제막식을 갖기도 했다.


흉상 제작은 서울대미술대 학장을 지낸 최인수 조각가가 맡아 백 전 원장의 젊었을 때의 모습으로 조각했다.


김 총재는 이날 “한국 고아들을 돌보고 키우는 일에 평생 헌신해 온 제인 화이트 여사에게 한국 사람으로 고마움을 길이 기억하고자 하는 뜻에서 흉상을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김 총재는 2004년부터 원생들의 문화예술 체험 기회 확대와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한국페스티벌앙상블 연주자를 초청해 매년 가을 음악회를 열어 줬다.


또한, 2004년 한국농구연맹(KBL) 총재로 취임해 농구관람을 전혀 해보지 못한 원생들을 제천에서 가까운 지역인 원주 DB 프로미 농구단과 연계해 농구경기를 원생들이 무료로 관람하도록 스포츠 체험학습의 기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백제인 여사와 김영수 총재, 40년째 이어진 인연...'선행이 선행으로'


시유지 1만1000㎡ 부지에 3층짜리 현 영육아원 건물 건축에 큰 기여...40년간 매년 후원금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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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위스콘신주에 살고 있는 조카가 제작한 예수가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는 목판화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제인 여사/사진=박현수


백제인과 김영수의 각별한 인연은 언제부터 어떻게 맺어졌을까. 이야기는 42년 전인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총재가 청주지방검찰청 제천지청장으로 재직하던 무렵, 백 전 원장은 제천 시내 허름한 전셋집에서 가난 등으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영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갈수록 점점 늘어나는 고아들을 수용하는데 집이 좁아 어려움을 겪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좀 더 넓은 시설을 갖춘 영아원을 갖고 싶다며 미국의 젊은 여성이 홀로 낯선 한국 땅에 와서 백방으로 뛰며 헌신하는 모습에 감동한 김영수는 당시 제천시장을 설득해 시유지인 현 부지(토지 1만 1090㎡, 대지 2779㎡)를 제공받았다. 또 관내 쌍용 등 5대 시멘트 회사로부터 시멘트 각 100포씩 500포를 기증받는 등 각계각층의 기업인과 시민들의 후원을 이끌어 내 현재의 3층짜리 영육아원 건물을 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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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총재(사진 앞줄 오른쪽서 다섯 번째)가 2018년 10월 12일 당시 한강포럼 김용원(앞줄 오른쪽서 세 번째)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과 함께 제천영육아원 정문에서 백제인 여사(앞줄 의자에 앉아 있는 이) 흉상을 제작해 헌정키로하고 십시일반으로 1억 원에 가까운 기금을 모아 흉상을 제작, 제막식을 갖고 기념 촬영하는 모습./사진=제천영육아원 제공


이후 제천지청을 떠난 김 총재는 해마다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 도움을 줬다. 설립 50주년을 맞은 지난 2013년엔 서울에서 버스를 대절해 한강포럼 회원들을 비롯해 뜻을 같이하는 지인 30여 명과 함께 방문, 음악회를 열고 성금 1500만 원을 전달하는 등 거의 매년 1500만 원 내외의 후원금을 전달해 왔다.


김 총재의 이 같은 선행은 42년째 이어지고 있어 감동을 준다. 한두 번 선행을 베풀 수는 있다. 하지만 40년 넘게 지속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안기부 1차장, 국회의원, 청와대 민정수석, 문화체육부 장관 등 공직을 마치고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을 본떠 설립한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조용히 청소년 지도자를 육성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홀로 찾은 낯선 땅 한국, 버림받은 영아들의 어머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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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백제인 여사가 유아들을 돌보며 기념 사진을 찍은 모습./사진=제천영육아원 제공


‘푸른 눈의 어머니’ 백제인이 한국에 홀로 와 일평생을 한국 영유아들을 위해 헌신하게 된 배경은 뭘까.


1936년 미국 위스콘신주 메디슨시티에서 태어나 가난하지만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좋아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1959년 크리스천 라이프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어린이 선교사 교육을 받던 중 신학교 동기인 잭 홈 목사로부터 도움 요청이 왔다. 잭 홈 목사는 당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6.25 참전용사인 사촌 오빠의 권유도 있었다.


1962년 한국에 온 후 ‘소년의 집’ 등에서 6개월 정도 봉사를 하다가 당시 교통의 중심지인 제천에 버림받은 아이가 많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제천으로 내려왔다. 1963년 2월 13일, 첫아기를 맞아들였다. ‘버림받은 한국 영아들의 어머니’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낯선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외국인 처녀의 봉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시선과 아이들이 생활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설들도 문제였다. 셋방살이로 전전하다 김영수를 만나 20년 만에 현재의 3층 벽돌 건물을 짓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항상 하느님과 함께 김영수, 그리고 희망이 되어준 아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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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제천영육아원에서 백제인 여사가 유아들에게 과일을 먹여주고 있다./사진=제천영육아원 제공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가 지금까지 길러낸 친자식보다 소중한 '자녀'는 1304명이나 된다. 지금도 갓난아이부터 고교생까지 33명이 그녀의 품 안에서 자라고 있다. 아이들이 비록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았지만 따뜻한 가정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자 입양사업도 했다. 해외입양이 중단되었던 1988년까지 733명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줬고, 235명은 수소문 끝에 친부모의 품에 안겨줬다.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시련 때문에 백제인 여사는 차마 글로 다 표현 못 할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입기도 했다. 지난 2013년 엄격한 훈육 방식으로 인해 일각으로부터 아동학대라는 오해를 사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다행히 지금은 정상을 되찾았다.


백 여사는 2013년 정년퇴임식에서 “미국을 떠날 때 하느님께서 '늙을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며 “아직도 검은 머리가 있고, 충분히 아이들을 돌볼 수 있으니 아이들과 같이 지냈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50년 동안 아이들을 돌보면서 결코 쉬운 여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며 “영육아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여러분이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유방암으로 시한부 삶 선고 극복해 일평생 헌신해온 것은 기적 같은 일”


김영수 총재는 이날 기자에게 “백 여사는 한국에 온 이후 28세 때 유방암을 앓아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으나 지금까지 일평생 한국에서 영아들의 어머니로 헌신해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성장해 제천영육아원에서의 생활을 돌아볼 때 밝은 웃음이 가득하고, 여러 나눔의 손길로 만들어진 행복한 집으로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성(姓)도 이름도 없는 고아들에게 백제인 여사는 자신의 미국 이름 ‘화이트(White)’에서 ‘제천 백(白)씨’ 성을 만들어 시조가 됐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수원 백씨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백 씨 성에다 이름을 붙여 줬다.


백제인 여사는 오갈 데 없는 한국 고아들을 위해 일평생 헌신 봉사해 온 공로로 지난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한 데 이어 2002년 제11회 유재라봉사상, 2004년 제16회 아산상 사회봉사상(사회지도자부문)과 2006년 제15회 제천시민대상을 수상했다.

 

등록일 : 2023-11-15 10:04     조회: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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