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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역사이다

바른사회운동연합

필자 : 이성낙 /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Die Berliner Mauer)’이 설치되었을 당시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필자는 공포심과 더불어 어리둥절하였고, 주변 서독인들도 몹시 분개하며 당혹해하던 모습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2019년,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 되던 해에 옛 동독 지역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새로운 변화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옛 동독 시절을 상징하는 이념성이 강한 공공예술품의 존치 여부가 궁금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고도(古都) 드레스덴(Dresden) 중심가에서 한 건물을 보았습니다. 콘크리트 건물로 외벽이 깔끔하게 관리된 상태였습니다. 근래 보수한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 중앙에 큰 벽화가 보였습니다. 벽화는 수많은 작은 세라믹 조각을 이용한 모자이크(Mosaic) 방식으로 꾸민, 전형적인 ‘공산사회주의 풍’의 벽화였습니다. 노동자의 모습과 옛 동독 국기(國旗)를 모티브로 한 대형작품이었습니다. 설명자에 의하면, 일부 파손된 벽화를 다시 새롭게 리노베이션(Renovation)한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옛 동독지역 소재 한 건물의 대형벽화
공산사회주의시대의 전형적인 작품(2019)



그래서 궁금증을 담아, “옛 동독 시절을 생생하게 생각나게 합니다.”라고 코멘트 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억도 역사이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필자가 "‘역사는 기억한다.’라는 말은 들었어도, ‘기억도 역사’라고?" 하며, 반문하자 그 근거자료를 메일로 보내주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훗날 받은 자료는 독일의 소설가 파울(Jean Paul, 1763~1825)이 집필한 저서 《가려진 특별석 (Die unsichtbare Loge, 1793)》에 “기억은 유일한 낙원이다. 그곳에서 누구도 추방될 수 없다.(Die Erinnerung ist das einzige Paradies, aus welchem wir nicht vertrieben werden koennen.)”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무형의 기억’을 그리도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깨우침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억이란 무형의 명사를 법률적 개념으로 살펴보면, 큰 의미가 보였습니다. 법정에서 진술은 많은 것이 진술자의 ‘기억물’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기억에 대하여 장황하게 논하는 것은 근래 몇몇 정치인이나 이념적으로 편향된 단체가 중심이 되어 ‘애국가’나 ‘초상화’를 놓고 친일 작가 운운하며, 적폐의 대상으로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얼마나 자주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감동하며 한마음으로 애국가를 불렀습니까.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로 우리의 기억이 숨을 쉬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국 곳곳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충남 아산에 소재한 현충사를 찾아,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 앞에서 엄숙히 참배하였습니까, 우리 모두의 기억에 깊이 뿌리내린 충무공 이순신이십니다. 바로 우리 기억에 기록된 역사입니다.

이제 만일 작가의 친일 논쟁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고, 충무공의 영정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기억의 역사를 박탈당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파울(Jean Paul)은 그래서 ‘기억은 누구도 손댈 수 없고, 손을 대서도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후세에 남겼는가 봅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혹독한 나치독일의 ‘범죄유산’에서 독일 사회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를 주의 깊게 지켜봤습니다. 독일 사회는 자해(自害)라는 단어가 연상될 정도로 가혹하게 나치와 선을 긋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독일 애국가(Deutsche Nationalhyumne)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보입니다. 가사는 시인 폰 팔러스레벤(Hoffmann von Fallersleben, 1798~1874), 곡은 우리에게 익숙한 하이든(Josef Haydn, 1732~1809)입니다.

어느 행사에서 독일국가를 처음 들었을 때, 왠지 ‘생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첫 소절이 “Deutschland, Deutschland ueber alles, Ueber alles in der Welt [독일,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독일 (번역, 위키백과 참조)]”이라 필자에게는 무겁게 전해왔습니다. ‘독일 우월 사상’이 강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1949년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할 때 ‘애국가’가 필요하였습니다.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의 첫 대통령 호이스(Theodor Heuss, 1884~1963)와 첫 총리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는 서신으로 위에서 언급한 애국가를 신생 독일에서도 계속 사용하기로 합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국내외 많은 사람은 ‘나치독일의 자만함을 연상케 한다고 강하게 반대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해, 1. 아데나워 총리는 나치독일하에서 혹독한 정치적 탄압을 받은 거물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2. 현재의 국가가 나치독일 이전 바이마르공화국 때부터 공식 국가입니다.)

그런데, 몇 가지 짚어보면, 1) 작곡가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인입니다. 즉, 독일인이 아닌 작곡가의 작품입니다. 2) 그 지긋지긋한 ‘나치독일’이 일부분이긴 하지만, 첫 소절, “Deutschland, Deutschland ueber alles, Ueber alles in der Welt”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나치독일의 국가’로 차용(借用)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전후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은 국가(國歌)의 첫 소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독일 사회가 옛 ‘나치독일’과 차별화 및 선 긋기를 하던 모습은 오늘 우리 사회가 ‘적폐 청산’한다며 접근하는 모습과는 달라도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근래 요동치는 ‘적폐 문제’로 우리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역사’를 함부로 손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등록일 : 2021-01-27 16:40    조회: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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