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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히로시마 원폭과 한반도> 2021-08-06

만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석구


만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76년전 오늘,194586일 오전 815. 일본 야마구치 현 히로시마 상공

 9450미터..미국 자치령 티니안 섬(북 마라아나 제도,사이판 인근)에서

2531Km를 날아온 B-29(애칭 에놀라 게이)에서 폴 티베츠 대령이 코드명

리틀보이(Little Boy)로 불리는 핵폭탄을 투하했다. 투하된 폭탄은 히로시마 상공

550미터에서 폭발했다.


리틀보이는 길이 3.3m,지름이 71 cm, 무게 4.7톤으로 TNT 1 5 (15 kt) 상당하는 폭발력을 가졌다. 히로시마 중심부 상공에서 터진 폭발로 폭심지 반경 1.2Km 범위에 있던 사람들의 50 7만명이 이날 사망했다. 그해 말까지 피폭 후유증으로 9만여명이 추가로 숨졌다. 그후에도 피폭 후유증으로 4만여명이 사망하는 원폭 피해사망자는 20만여명이나 됐다. 한국인 사망자도 3만여명이나 된다.


3일뒤인 8 9 오전 111 코드명 "(Fatman)으로 불리는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8만여명이 사망했다. 국민 옥쇄를 부르짖으며 완강하게 버티던 일본은 원폭 2발에 손을 들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6 뒤인 815 히로히토 일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한편 소련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뒤인 88 일소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는 58 나치독일 항복으로 한숨 돌린 소련에 미국이 참전을 요청함에 따라 이뤄졌다. 당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입은 극심한 피해로 일본과의 전쟁에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팽창 야심으로 대일 참전을 결정, 전후 과실 나눠 먹기에 나선 것이다. 소련은 사기가 떨어진 만주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그대로 두면 소련은 한반도는 물론 일본 본토까지 진출할 기세였다. 소련은 일본의 미소 분할 점령을 원했다. 반면 미군은 일본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격이 늦어져 한반도까지 진출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전망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30만명 이상의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다. 이때 미국이 소련이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그은 선이 38도선이다. 이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은 소련이 점령하는 것으로 양측은 합의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만일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전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일본의 패배는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1억옥쇄를 구호로 내걸고 결사적인 저항을 하고 있었다. 미군이 원자탄을 사용 않고 일본 본토에 상륙, 전쟁을 끝내려면 막대한 희생이 예상됐다. 전쟁은 더욱 길어 졌을 것이다. 경우 소련은 한반도는 물론 일본 본토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었다. 독일을 연합군과 소련이 분할 점령한 것처럼.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한반도는 소련 점령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오늘 번영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다. 물론 한반도도 남북으로 나눠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이 들어섰을 것이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탄이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

 

                                                               이석구  (바른사회운동연합-자문위원)

등록일 : 2021-08-06 14:36     조회: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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