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 이석구
<바른사회운동연합 상임자문위원>
<전 언론인>
<프리즘>SF강화 조약과 약소국 한국의 비애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예술 센터. 미국 영국 등 연합국과 일본이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다음 해 4월 28일 발효된 이 조약으로 일본은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배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했다.
이 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모두 48개국. 협상에 참여한 나라는 51개국이었으나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소련 그로미코 외상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초안에 ▶일본의 군대 창설을 방지할 장치가 없고,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의 주권을 인정않는 등 소련의 핵심 관심사가 반영 안됐다며 서명을 거부했다. 그는 또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회담에서 배제”되고, “미국이 일본을 공산권과 대치하는 기지로 삼으려 한다”며 반발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담에는 일본침략의 최대 피해자이자 이해당사자인 남북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등 4개국이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6.25 전쟁 중이었던 한국과 북한은 “어느쪽이 한반도를 대표하느냐’는 문제로 회담에 초대받지 못했다. 장개석의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누가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인가”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견해차로 참가하지 못했다. 영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대표로 참석시키자고 했으나 미국은 이에 반대, 결국 둘다 초대받지 못했다.
협상을 주도한 미국은 동서냉전에 따른 세계질서 재편과 미 국익의 극대화가 주요 관심사였다. 한반도에 관해 무지한 미국에게 한민족의 운명 같은 것은 사실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국은 소련의 팽창과, 공산화된 중국대륙에 대처하는 자유진영의 전진기지로 일본을 선택했다. 동서냉전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유럽은 북대서양조약기구로, 극동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공산진영에 대처하는 세계질서 개편이 미국의 기본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도 180도 바뀐다. 미국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는 국가로 만드는 것”을 일본 점령정책의 제1목표로 삼았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일본의 군산 복합체가 군국주의로 치닫게 된 원인으로 보고 재벌해체를 단행했다. 그러나 중국대륙이 공산화 되고 6.25가 터졌다. 미국은 일본을 공산주의 팽창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의 재벌해체 정책을 버리고 일본재건과 국력강화에 힘을 쏟았다. 이런 상황에서 6.25는 일본이 다시 일어서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됐다.
만일 한국이 승전 연합국의 일원으로 강화회담에 참여했다면 한국의 운명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배상이나 위안부, 독도문제 등에 발언권을 행사함으로써 한일간 현안이 일찌감치 정리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해방은 우리가 투쟁해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운명을 결정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도 미국과 소련의 대결로 초대받지 못했다. 중국대륙을 석권한 중공마저 협상에 참가, 자국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한반도는 6.25 전쟁의 와중에 있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장개석의 중화민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얄타회담, 포츠담 선언에 참여하는 등 2차대전 승전국이었음에도 강화회담에 초대받지 못했다. 중국대륙을 모택동의 중공에 빼앗기고 대만으로 쫒겨간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캄보디아, 실론,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베트남, 파키스탄, 필리핀 등도 회담에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소련 어느 한 진영이 결사반대 하지 않은 때문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역사에서 잘못된 것을 배우고 다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 일본에 식민지가 된 것도, 승전국의 일원으로 강화조약에 참여하지 못한 것도 결국 힘이 없어서다. 부국강병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와 자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념과 정의, 도덕이 나라를 지켜주지 않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백악관 대국민 연설에서 “아프간조차 스스로 싸우려 하지 않는 전쟁에서 미군이 싸우고 죽어선 안 된다”고 미군철군을 정당화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