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 •약사평론가회 前 회장
(사)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윤리라는 잣대가 흔들리고 있기에
미국으로 이민 간 어느 분에게서 “미국에서는 윤리가 법이더군요.”라는 말을 듣고 좀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필자는, 윤리와 법은 같은 높이의 동격이 아니라는 점, 윤리는 법보다 분명 상위 개념이라는 점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윤리를 개개인이 인정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양심 법’ 정도로 알고 있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필자가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근래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의 ‘택시 기사 폭행’ 사건과 현직 대통령 아들 문준용 화가 관련 언론 보도 때문입니다. 요컨대 윤리 개념을 떠나 양심 수준의 문제를 가지고 사회가 들썩였단 얘깁니다.
법조계 고위 공직자가 택시 기사에게 물리적 폭행을 가했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엄하게 형사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필자가 비윤리적 사건에 연루된 의료인에겐 한층 더 강한 제재(制裁)를 가해야 한다고 누차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상류층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솔선수범하며 사회에 본보기가 되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 또는 귀족은 수범을 보인다)’라고 합니다. 여기엔 사회에서 이름을 날리는 명사들은 그 명성에 상응하는 행동 제약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욕된 사건에 휘말린 사회 명사가 유독 거친 반감에 직면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은 다른 성격의 이슈이지만, 넓은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측면에서 필자는 문준용 작가의 작품 구매 과정을 놓고 떠들썩한 사회 풍토가 왠지 마음에 걸립니다. 논란의 핵심이 작가의 작품성에 있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얼마 전, 배우 구혜선 씨의 그림을 놓고 미술 대학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라며 깎아내리는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필자는 그림이라는 창작품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의 종착점은 구매자의 선택에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중앙일보, <리셋 코리아>, 아마추어 작가 경시하는 미술계 풍토[2021. 5. 24.])
이와 관련해 문준용 화가의 작품을 놓고 ‘尹 캠프’의 부대변인이 비판 논평을 내놨다가, 하루 만에 부대변인의 논평은 캠프의 공식 입장과 이견이 있다며 철회하는 촌극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진중권 교수가 나서서 “문준용 작품 괜찮다”라며 ‘윤 캠프’를 나무라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선거의 계절에 벌어진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논점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작가의 작품성에 있지 않고 문준용 화가가 대통령의 아들이라서 벌어진 일입니다.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사회적 ‘눈길’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즉, 매사에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기를 바라는 일반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얘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준용 화가가 “나보다 더 어려운 작가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해주세요.”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런 배려를 기대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 나라 미술계에 종사하는 수많은 젊은 작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몇 년 전 국내 미술전에서 특상을 받은 한 젊은 작가가 생활고를 못 이겨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택시 기사가 되겠다고 토로(吐露)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며 비통해하던 젊은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근래에는 국민의힘 곽상도 의원의 아들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곽상도 의원의 아들 곽병채 씨가 6년간 근무한 ‘(주)화천대유’에서 퇴직금(건강 악화 보상금 포함) 명목으로 무려 50억 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상식을 넘어선 금액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익을 접하게 되면 과연 이것이 옳은가 먼저 생각하라[견득사의(見得思義)]고 하신 율곡(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우쳐주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모든 혼란은 결코 흔들려서는 아니 되는 ‘윤리의 잣대’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이 아주 어수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