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냐, 협치냐
‘우리는 폭주하는 대통령을 맞거나 식물 대통령을 갖게 될 것 같다’. 김 종인 박사(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가 지난 10일 출판기념회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뒤 ‘일 잘 한다’는 것을 앞세워 국회의 절대다수 여당과 함께 질주한다면 ‘야당은 존재조차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윤 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당선되더라도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의 견제로 ‘식물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익숙, 협치(協治)가 서투른 우리 정치구조에서 당연히 나올 법한 얘기다. 그러나 이는 꼭 맞는 얘기는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도 협치로 국정을 운영한 전례가 있다. 물론 대통령이 권력을 스스로 놔 준 것은 아니다. 여소야대라는 정치 지형이 그렇게 만들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현행 헌법 아래서 탄생된 노태우 정권의 사례가 좋은 예다. 노 정권은 집권 초기 2년간 여야 합의로 국정을 이끌었다. 노 전 대통령은 야당과 만장일치로 5공 특위를 꾸려 전 두환 전 대통령을 청문회에 출석시키기도 했다. 또 통일 특위를 통해 한민족통일 방안이라는 북방정책의 기틀도 마련했다. 야당과 상임위원장을 나눠 갖고 예산과 법률심사도 협의해 처리했다. 여소야대 정국이 강요한 때문이지만 다당제하의 내각제처럼 협치가 이뤄졌다.
여소야대 정국 하에서 이뤄진 노 전 대통령의 협치는 오래 가지 못했다. 협치는 시간과 노력, 인내심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권력을 야당과 나눠 갖겠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여야 모두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다는 자세로 국정에 임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야당에 끌려가는 정국을 견디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세력의 의지대로 국정을 이끌기 위해 3당 합당이란 정계개편을 단행했다. 1백25석의 민정당을 2백석의 민자당으로 바꾼 것이다. 이로써 모처럼 이뤄지던 협치는 종언을 고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제도를 고치지 않고도 이뤘던 협치 실험은 막을 내렸다.
20대 대통령 당선자 역시 제왕적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이 재명 후보는 강한 추진력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과거 행적도 보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다. 벌써부터 ‘민주당의 이재명이 아니라, 이재명의 민주당’이라고 외친다. 이런 의식을 가진 이 후보가 절대다수의 거대 여당과 막강한 대통령 권력마저 거머쥔다면 어떤 국정 운영을 펼칠까? 아마 그 어느 대통령보다도 더 제왕적인 대통령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절대 다수 여당에게 패스트트랙을 활용, 자신의 공약을 입법화하라는 주문까지 한다. 김 종인 박사의 ‘폭주 대통령’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윤 석열 후보도 민주적 마인드가 부족한 건 마찬가지다. 평생 상명하복의 검사생활을 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습성이 몸에 배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절대다수 국회의석을 가진 민주당이라는 야당의 견제 기능이 있다. 오히려 국회권력에 눌려 제대로 국정운영을 못하는 상황이 우려된다. 국민의힘 의석은 1백6석으로 3당 합당 시 소수여당이던 민정당의 1백26석보다도 훨씬 적다. 김 종인 박사의 식물 대통령론이 나온 근거다. 여기까지는 김 박사의 예측이 맞다.
그러나 차기 정권의 색깔이 확연해지는 것은 6월 지방 선거다.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이긴다면 현 집권 세력은 거침없이 폭주 할 것이다. 김 박사 예측대로 야당은 거의 존재조차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패한다면 집권세력의 폭주가 계속되기는 힘들다. 2년 후 치러질 총선도 생각해야하기 때문이다.
윤 석열 후보는 당선 되더라도 총리 인준부터 거대여당의 강한 견제에 부딪칠 것이다. 독주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법제화가 필요한 그의 공약은 민주당의 견제로 겉돌 것이다. 윤 후보는 협치, 제왕적 권력, 정치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를 돌파해야 한다. 거국 내각에 준하는 국민통합 정부는 필수다. 따라서 안철수 국민의 당 후보와의 단일화는 선택이 아니라 당위다. 그가 기댈 것은 여론과 가능한 한 우군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다가오는 지방 선거는 ‘협치냐, 식물 대통령이냐’냐를 가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국민의힘이 지방 선거에서도 승리할 경우 민주당도 대통령과 협치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방선거에서 패한다면 협치고 뭐고 없다. 윤 후보는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정국은 표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