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곳간에서 기품’이 날 때입니다.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우리 속담에 “곳간(庫間)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듯한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베풀려 해도 궁핍하면 어렵다는 뜻이겠습니다. 반면 곡간(穀間)에 추수한 곡물이 가득하면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들리고, 생긴다는 의미도 함축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950~60년대, 우리나라의 곳간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참담하였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인 안네 크루거(Anne Krueger) 박사가 워싱턴에 모인 ‘Africa Governors-Group’에서 연설한 내용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2004년 10월 4일): “세계에서 인구밀도는 가장 높고, 게다가 물가상승률(inflation rate)도 가장 높으며, 수출은 GDP의 3%뿐이며, 그 수출품의 88%가 일차 산업품이었습니다. 본인은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50년대 후반, 아시아에서 3번째로 가난했던 한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한국이 경제 성장에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1960년과 2000년 사이에 일인당 실질 GDP가 1,995달러에서 10배나 늘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필자는 그 시절 어두웠던 국가, 사회상을 돌아보며, 오늘 우리가 누리는 위상이 신기하고 꿈만 같습니다.
그 무렵,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필자에게 고국에서 전해오는 소식은 태풍이나, 홍수로 마을 전체가 휩쓸려갔다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참상이나, 명절에 귀성객들이 몰려 열차에 서로 타려다 서울역 구내에서 ‘대형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든가 또는, 대형 아파트가 ‘폭삭’ 주저앉는 사고로 수많은 인명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주종을 이뤘습니다. 한 마디로 근래 먼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후진국형’ 재난이 반세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그림’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고국의 그 같은 소식에 필자는 알게 모르게 주눅이 많이 들었던 같습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들어 일본 자동차들이 유럽의 도시 곳곳을 누비기 시작하고, 대형 버스를 타고 단체 여행하는 일본 관광객을 볼 때면,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언제나 유럽에 나타날까 기대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와는 멀고도 먼 ‘그림 같은 이야기’일뿐이었습니다. 그런 그림 위에 오늘날의 여러 모습을 옮겨놓으면, 필자는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고, 기적이 이런 것인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연히 근래에 현대자동차 개발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전문가와 독일 자동차 개발부에서 일하는 전문가가 함께한 자리에서 필자가 한국 자동차가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물어봤습니다. 답은 미국에서는 미국 자동차, 독일 차, 일본 차 그리고 한국 차라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독일 차, 일본 차 그리고 한국 차 순이라고 하면서 ‘3.5위’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독일 전문가는 한국이 독일의 반값으로 동등한 차를 만든다는 점에서 한국 차가 으뜸이라 말합니다. 독일이 한국 차를 벤치마킹하는 이유라고도 합니다.
자동차 강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발전·성장한 것입니다.
다시 1990년대로 돌아가면,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면, 크고 작은 금품이 여기저기서 횡행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자금’이 무슨 정당한 사회언어로 자리매김이라도 한 것 같았습니다. 필자는 그런 모습에 얼마나 큰 좌절감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강력한 ‘공직선거법’이 발효하더니 선거 계절에 점심 한번 잘못 먹으면, 10~50배에 상응하는 액수를 ‘토(吐)’해내야 하고, 점심 제공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 졌습니다. 실로 선거풍토와 관련해서 ‘천지개벽’이라는 어휘가 떠오를 정도로 사회가 ‘청결’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와 함께 ‘청탁문제’가 사회 문제로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보면서 반세기 전의 여러 현상과 비교하면, 분명 크게 개선·발전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1980년대 초, 서울에 ‘마이카 붐’이 일어나자, 거리는 ‘빵빵’거리는 자동차마다 뿜어내는 클랙슨(경종) 소리로 소음공해가 대단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참으로 조용한 편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터널 앞에서 진입하려는 차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차머리’를 앞으로 들이미는 통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물 흐르듯’ 흘러 들어갑니다. 쑥스러운 말로 ‘많이 선진국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사회의 품격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특히 이젠 우리의 ‘곳간이 꽉 차 있습니다.’ 2015년도 국제무역수지에서 경상수지흑자가 세계 4위라고 합니다. 총액기준 경상수지흑자에서 1위 중국(3,310억 달러), 2위 독일(2,840억 달러), 3위 일본(1,360억 달러), 다음이 4위 한국(1,060억 달러)입니다. 그런데 이 수치를 인구비율로 보면, 1위 스위스(90,890억 달러), 2위 독일(34,550억 달러), 3위 한국(20,920억 달러), 4위 일본 10,680억 달러) 5위 러시아(10,680억 달러) 그리고 6위 중국(2,410억 달러) 순인데, 일인당 금액을 보면 우리의 수치가 일본보다 거의 2배이고, 중국보다는 약 8.7배나 됩니다.
필자는 우리나라 곳간이 이젠 채워질 만큼 채워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곳간에서 인심과 더불어 기품(氣品)도 배어 나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사회는 경쟁과 갈등이 만연합니다. 사회 곳곳에서 난무하는 거친 막말과 무질서는 우리의 행복지수와도 큰 연관이 있습니다. OECD 주요국의 국민총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를 보면 우리나라가 OECD회원국 36개국 중 24위입니다. 우리의 행복지수는 참담한 형편입니다. ‘곳간과 행복지수’가 엇갈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이 지난 반세기에 비하여 몰라보게 개선·발전하였듯이 향후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에 힘을 보태는 길은 ‘사회의 품격’, 즉 문화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나름 희망을 가져봅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 前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 2019-01-24 | 조회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