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는 수술하듯 도려낼 수 없다”
필자 : 이성낙 교수(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 대 피부과학 교수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가천대 명예총장, 한국의 •약사평론가회 前 회장(사)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재)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과거사는 수술하듯 도려낼 수 없다” 얼마 전, 독일언론에서 무게 있게 다룬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필자의 뇌리(腦裏)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필자가 독일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로, 유럽 문화권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으며 살아온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유럽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에 자연스레 관심이 갑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독일 유학 생활 초창기에 지도교수에게 “무슨 책을 읽으면 독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대답은 아주 뜻밖이었습니다. 독일과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이나,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교수님의 가르침은 사뭇 놀라웠습니다. 지도교수님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필자는 영화 ‘안네의 일기(The Diary of a Young Girl)’를 관람한 뒤,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점이기도 하여 퍽 혼란스럽기까지 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를 보는 시각에도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가해자의 시각에서만 보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가해자를 피해자의 시각에서 보면 달리 보인다는 것을 지도교수는 저에게 가르쳐 주시려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매사에 넓은 시각을 가지도록 노력해보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독일 태생 여성 소설가 카타리나 폴크머(Katharina Volckmer, 1987~ )는 열아홉 살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조국 독일이 나치만행의 역사에 깊이 묻혀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는 ’정신착란‘에 가까운 혼란을 겪게 되고, 그 충격으로 정신과 전문의의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만큼 자신의 조국 나치독일의 만행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녀는 그런 내용을 담은 《예약 (The Appointment)》 (Fitzcarraldo Editions, London, 2020.), 《예약 (Der Termin)》 (Kanon Verlag Berlin GmbH, 2021)’을 영국과 독일에서 출간했습니다. 독일의 저명한 신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Frankfurter Allgemeine)》(2021. 08. 06.)는 저자와의 인터뷰를 신문에 크게 실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작가가 1987년생이기 때문에, ‘나치독일’을 직접 체험하지도 않았고 단지 그 내용을 역사를 통해 배우고 터득한 상황인데도, 히틀러가 꿈에 악몽처럼 나타나기도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역사의 상처와 무게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작가는 인터뷰에서 “과거(사)는 외과수술로 도려낼 수 없다. (Vergangenheit laesst sich nicht chirurgisch entfernen).” 즉, “없지 않은가?”라며 절규하듯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 점이 필자에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사와 관련해 필자는 조지 산타야나(George Stantayana, 1863~1952)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하고 말 것이다(Wer sich seiner Vergangenheit nicht erinnert, ist dazu verdammt, sie zu wiederholen.)”라는 경고성 명언을 기억합니다. 필자에게는 카타리나 폴크머가 ‘역사는 교정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그처럼 분명하게 표현하였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작가는 자국의 역사가 그처럼 지긋지긋하다 해도 ‘도려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일에서는 독일이 자랑하고, 독일을 상징하는 자동차 ‘VW’가 나치독일의 수령인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고안하고, ’국민차(Volkswagen)‘라는 이름까지도 지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용하는가 봅니다. 그 다른 예가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입니다. 독일에 살면서, 그 누구도 ‘히틀러의 유산’이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를 듣지 못했습니다. 자랑할지언정,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조선 시대에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시킨다는 부관참시(剖棺斬屍)’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슬펐는지 기억이 생생합니다. 자괴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한 국회의원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특정 인물의 ‘부관참시’를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역겹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잡설을 들은 필자의 귀를 씻고’ 싶었습니다. (밝힘; ‘향나무 뽑기와 적폐청산’ (자유칼럼, 2019.4.18.)에서도 ‘부관참시’ 관련 글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것이 바로 지난 수년간 끈질기게 자행하여온 이른바 ‘친일 적폐청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이 또다시 적폐청산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 2021.11.27.) 거기에다 더 요사(妖邪)한 것은 충무공의 “표준영정을 새로 제작한다면 어떻게 제작하는 게 좋을까”라며 여론조사를 빙자한 ‘여론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의 ‘문화’가 오늘따라 왜 그리 왜소하게 다가오는지. 이제, 우리는 ‘전 지구가 하나의 문화’라는 흐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그대로 온갖 매체를 통해 해외로 투명하게 전해지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친일 운운, 적폐 운운’ 같은 용어 자체가 민족적 옹졸함으로 비칠까 염려스럽기도 하고, 특히 친일, 친중국, 친미 운운하는 언동에는 반일, 반중국, 반미라는 편 가르기 심성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여 더욱 그러합니다. 독일 소설가 카타리나 폴크머는 모국의 지난 역사로 인해 정신적으로 크게 갈등하면서도, 불편한 과거사를 수술하듯 도려낼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득도에 가까운 독백을 합니다. 그의 이런 태도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별다름’의 메시지처럼 느껴져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른사회운동연합 | 2021-12-08 | 조회 920